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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미경 자유기고가 / 사진 : 이진우 사진가 [2003년 01월 통권 14호]
겨울이면 '월호'가 되는 임랑 바다


해안선 끝에 고리원전을 펼쳐 둔 임랑해수욕장은 최근 들어 부쩍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동해 남부의 해수욕장 가운데 하나다. 겨울이면 해수욕장이라는 이름을 벗고 그저 임랑 앞바다가 되지만, 이 겨울 동안의 한적함은?월호(月湖)?라는 임랑 바다의 또 다른 수식어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검바다의 잔물결과, 1.5km에 달하는 너른 모래사장의 흰빛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달빛을 좇아 임랑을 찾았다.

계절 따라 변하는 바닷가 풍경

여름에는 사람이 바다 앞에서 일상의 더께를 벗고 벌거숭이가 되지만, 겨울에는 바다가 더께를 벗는다. 올 한 해에만 100여 개의 해수욕장이 개장을 했던 동해를 비롯 서해, 남해가 또 하루 30만 명의 인파가 찾아들기도 했던 해운대나 광안리 바다들이 여름 내 달았던 '해수욕장'이란 수식어 대신 본연의 이름을 되찾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위치해 있는 임랑해수욕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동해 남부의 해수욕장으로서 지난 여름 동안 많을 때는 하루 10만 명의 사람들이 몰리기도 했던 이곳이 겨울이 되자 인적 드문 겨울바다로 변했다. 이제는 불리어지는 이름도 그저 '임랑 앞바다'다.

"같은 부산 시내의 해운대 해수욕장이 워낙 유명한데다, 가까이에 여러 해수욕장들이 즐비해서 임랑은 얼마 전까지도 조용한 곳이었어요. 그러던 것이 사람들이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이곳도 제법 인파가 몰리는 해수욕장이 됐지요. 동해의 해수욕장들에 비해 수심이 얕아 가족 단위 해수욕객들에게 안성맞춤이라고 하더군요. 이제는 열서너 가구가 민박을 할 정도로 커졌어요." 임랑에서 가까운 나사리 마을 주민 정희갑 씨의 말이다. 여름 한 철, 사람들이 몰리는 이곳 해변에서 먹거리 장사를 한다는 그이 역시, 오늘은 그저 ?마실?을 가느라 지나치는 중이다. 해수욕장이 '그냥 바다'가 되기 때문이다. 여름 내 북적이던 민박집들, 발 디딜 틈 없던 횟집들, 미역 농사를 짓는 농가들에게도 여름에는 생활의 터전이었다가 겨울에는 풍경이 되는 것이다.

"겨울 바다, 뭐 볼 게 있다고 찾아드는지, 그래도 먼 외지에서 사람들이 와. 아베끄라나 뭐라나. 그런 사람들이 와서는 춥지도 않은지 백사장을 따라 걷기도 하고, 그냥 앉아 있기도 하고 그래요."

하도 보아서인지 이이에게는 도통 심드렁한 임랑 앞바다의 겨울 풍경. 그런데도 그이 말마따나 '아베끄족' 두서너 쌍이 눈에 띈다. 연인들에게 겨울바다는 추억을 새김하는 낭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 임랑의 해변은 결이 고운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1.5km에 달하는 하얀 모래사장이 푸른 바다 빛깔과 대비를 이루며 드문 풍경을 자아낸다.

낭만과 추억이 어린 겨울바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찬 해풍에도 아랑곳없이 해안선을 따라 걷거나 오두마니 어깨를 대고 앉아있는 연인들. 슬며시 밀려와 백사장 자락을 간질거리고는 '까르르' 흰 포말을 일으키며 되돌아가는 바다의 장난을 바라보다가는, 이내 조약돌 몇 개를 집어든다. 혼내주기라도 하려는 듯 힘껏 던져보지만, 조약돌이 그리는 포물선의 길이는 가없는 수평선의 길이에 비하면 너무 짧다.


연인들을 지나쳐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니 임랑천이 바다와 합류되는 지점에 이른다. 임랑 바다의 또 하나 특징이 바로 이곳에 있다. 임랑천 맑은 물과 소금기 섞인 바닷물이 어우러지기 때문에 민물낚시와 바다낚시의 즐거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것. 또 갯바위를 포함해서 굽어진 모양새의 임랑 방파제는 강태공들을 유혹하는 낚시터로도 인기가 높다.

"이곳 방파제로 곧잘 낚시를 옵니다. 방파제엔 해조류가 많고 그로 인해 생성된 풍부한 먹이들 때문에 치어들이 많이 서식합니다. 운만 따른다면 치어를 잡아먹기 위해 몰려온 씨알 굵은 놈을 곧잘 낚아낼 수 있지요. 또 갯바위보다 낚시하기가 안전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 겸해 자주 옵니다."
대구 달성군에서 새벽을 돋아 내려온 김성훈 씨. 따뜻한 이불 속 벗어나기가 퍽도 힘든 계절이지만, 낚시 계획만 있다 하면 눈이 번쩍 뜨인단다.

잡어 몇 마리로 손 재미는 보았는데, 돔을 건져 올리는 게 오늘의 목표다. 그이의 목표 달성을 지켜볼 겸 방파제 가에 오래 앉아 있으려니 짙푸르던 바다 물색이 서서히 희붐한 하늘빛을 닮아 간다. 채 흡수되지 못하고 맹렬히 퉁겨지던 파란 빛 햇살들이, 저무는 해와 함께 사그러들면서 이제 곧 바다와 하늘을 가르던 수평선의 경계가 손가락 끝으로 문지른 듯 지워질 형편이다. 서둘러 임랑 앞바다 모래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저 많이 지우고 비운 배경에 '월호(月湖)'라는 그림이 그려질 것이므로….


하나 둘 가로등이 밝아 오는 대신, 이전의 연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난 뒤다. 저 멀리 새로운 한 쌍이 갯바위처럼 미동도 없이 웅숭그리고 있다. 그 옆을 스쳐 점점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이. 흰 입김을 걷고 나서 바라보아도, 머리가 히끗한 임랑리 주민 백기호 씨다. <달리는 기장 사람들> 소속 마라토너인 그이는 매일 하루도 거름 없이 임랑 해변을 달린다.
"매일 10km 씩 뛰어요. 이곳 해안선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그만큼의 거리가 되지. 요즘엔 가로등이 켜져서 너무 좋아요. 어둔 시간에도 달리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올해 예순 일곱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그이는 이곳 임랑리 토박이다. 철도청에서 오래 공직생활을 하다 퇴직한 이후로, 지금은 한 아파트의 경비일을 보고 있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는 10년 가까이 되었는데 거른 날이 거의 없으니, 이곳 해변에 가장 많은 발자국을 남긴 이가 어쩌면 그이일지도 모르겠다.

이 바닷가에서 벌거숭이로 뛰놀았는데 백발이 되다니

"봄, 가을에 멸치 떼가 올라오면 바다가 벌겋게 보였어요. 우리 고향 사람들, 다들 그 바다 하나 믿고 살았지. 그러다가 한 삼십 년 전에 고리원전이 들어오면서 많이 변했어요. 생업도 달라지고, 발전이 많이 됐지. 저 가로등도 그 영향일지도 몰라요. 또 몇 년 전부터는 해수욕장으로 인기가 높아져서 풍경이 다시 변하고 있어요. 백사장에 샤워실, 공중화장실 같은 편의시설도 들어서고…. 내가 이 바닷가를 벌거숭이로 뛰어다니다 이제 백발인데, 세상도 변하는 거지요. 그렇게."
한켠에서 아이들이 불꽃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오래 이이와 이곳 해안선처럼 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갓 돋움한 해초 마냥 머리를 풀어헤친 두 여자아이가 백사장 한켠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월래초등학교 1학년 현진이와 좌천초등학교 1학년 다은이. 비록 학교는 다르지만, 이 아이들은 서너 집을 사이에 두고 임랑 바닷가에 이웃해 있다. 그래서 두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으레 동무가 된다.
이들의 놀이터는 임랑의 백사장이다. 자신들의 놀이터에 언제부턴가 찾아드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지만, 그 해수욕객들과 MT 온 언니오빠들에게 먼 도시의 이야기도 듣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들도 도회지로 나가는 상상을 한다.

"저는 나중에 커서 피아니스트가 될 거예요. 그래서 세계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연주를 들려줄 거예요."
현진이는 아직 제가 되고 싶은 꿈의 명칭도 분명히 발음치 못하지만, 하루 두 시간씩 꼬박꼬박 꿈을 향한 정진을 한다. 현진이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에는 가수가 꿈인 다은이는 바닷가에서 혼자 노래를 부른다. 파도소리로 현진이의 피아노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주듯, 바다는 다은이의 노래에 청중이 되어준다.

원전 위로 떠오른 달을 향해 가는 한밤의 불꽃

아이들이 쏘아 올린 불꽃이 달을 향해 있다. 달은 정확하게도 고리원전의 둥긋한 돔 사이에 떠올라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원자력의 불을 밝힌 고리원전과 그 위로 떠오른 시원의 빛은 묘한 연계성을 지닌다.

달. 임랑 앞바다의 달. 이곳의 월출경은 옛부터 '차성팔경'의 하나로 여겨졌을 만큼 유명하다. 예전 사람들은 이곳 임랑천의 맑은 물에서 낮에는 천렵을 하고 놀다가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님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다 한다.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바다에 둥긋 떠오르는 달의 모습이 얼마나 좋았으면, '월호(月湖)'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동산에 달이 뜨고, 임랑천에 달이 있고, 천파만파 잔잔한 물결 속에 수천 수만의 달이 잠기고, 백사장에 달빛이 서리고 님의 얼굴이 달덩이 같고 내 마음이 달과 같다."라는 한시도 전한다. 그 월호 앞 백사장에, 연인 한 쌍이 그림처럼 앉아있다.

사위가 어두워질수록 더 선명해지는 달빛이 수면 위에 고요한 임랑의 겨울바다. 밤이 깊어갈수록 육풍으로 바뀐 바람이 바다 쪽으로 거세게 몸을 떠다민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 미지(未知)의 새 /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 그대 생각을 했건 만도 / 매운 해풍에 /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 허무의 / 불 /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 나를 가르치는 건 / 언제나 /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 남은 날은 / 적지만 // 기도를 끝낸 다음 /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 남은 날은 / 적지만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 인고(忍苦)의 물이 /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겨울바다' 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린다는 김남조의 시 <겨울 바다>처럼, 흔히 절망과 허무로 대변된다. 하지만 수평선을 향해 계속 걸어나갈 수 없을 바에야, 등 떠밀던 바람에 정면으로 맞서며 다시 한번 되새김할 수밖에. "살자, 살아보자꾸나" 하고. 이제 곧 저 어둠의 겨울바다가 수평선 위로 새날의 해를 밀어 올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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